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쑹 전투 (문단 편집) === 우쑹의 함락 === ||[[파일:BLOODYSATURDAY.jpg]]|| || 1937년 8월 28일, 일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상하이 남부역에서 울부짖는 아기[* 이 아기는 촬영직후 바로 구조된다.] || 하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있었고, [[함포]] 사격과 기총소사, 폭격의 엄호를 받은 일본군은 하루에 100~600m씩 악착같이 전진하면서 우쑹을 공략했다. 8월 31일, 치열한 [[백병전]] 끝에 일본군이 우쑹 포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이 우쑹을 장악, 공세 주도권은 일본군에게로 넘어갔다. 9월 7일 마쓰이 이와네는 "기존 상하이 파견군으로 중국군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타이완]]에서 시게후지 지대를 차출하여 9월 18일 촨사전에 투입하였고, 9월 10일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5여단의 증파를 요청하였다. [[이시와라 간지]] 작전부장은 이에 대해 반대했으나 오히려 경질되어 9월 28일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쫓겨나고, 신임 작전부장은 확대파 시모무라 사다무 소장이 차지하면서 증원이 확정되었다. 특히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역]]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일본은 이미 현역병들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정도의 규모의 전쟁을 맞이한 것이었다. 여러모로 우쑹 전투는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 지도부의 패착이 겹쳐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투였다. 우쑹 함락까지 일본군 3사단에는 전사자 1,080명, 부상자 3,589명이 발생했으며, 11사단은 전사 1,560명, 부상자 3,980명을 내면서 전체 병력의 3분의 1을 상실했다. 게다가 3사단과 11사단은 이후에 예비군들을 긴급히 소집한 군기가 문란한 사단이 아니라 현역병들로 구성된 정예사단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군의 피해는 상당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